조별과제와 발표에 관한 아재의 추억팔이글

예전에는 뭔가를 조사하려면 일단 도서관에 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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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뭔가를 조사하려면 일단 도서관에 가야했다. 정보에 대한 접근 방법 자체가 아주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절에 방송에 어디어디 교수나 박사라는 사람이 나와서 뭔가 한마디 하면 일반인으로서는 그게 맞는지 틀린지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도서관에 가더라도 대체 그에 관한 정보가 어느 책에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 부터가 이미 무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언론은 정보에 있어서만큼은 그야말로 무소 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만큼 더 막중한 책임감으로 자신들이 내보내는 정보를 검증했어야 할텐데 정말 그랬는지 방송업계와 관련 없는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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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시엔 조별과제를 하려면 일단 도서관에 모여서 주제와 관련있는 분야의 책들을 왕창 들고 열람실에 둘러앉아서 각자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관련된 부분을 찾아 취합해야 했다. 그렇게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취합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발표 자료를 만들고 발표하는 것이다. 이 시절에 조별과제를 지배하는 것은 집에 백과사전을 가진 친구와 글씨를 잘 쓰는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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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자료를 만드는 방식의 변천사도 재밌는 기억이다. 내가 겪은 한도 내에서 제일 오래된 방식은 2절지에 손으로 쓰는 거였다. 그걸 궤도에 걸어서 한 장씩 넘기면서 발표를 했다. 선생이나 발표자가 지휘봉을 들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궤도에 걸린 종이를 넘기기 위한 도구다. 종이를 일자로 잘 넘기지 않으면 종이가 구겨지거나 찢어져버리기 때문에 튼튼하고 긴 막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궤도에 글자를 쓰는 것도 몇가지 요령이 필요한데, 우선 조에서 글자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을 선별해야 한다. 그리고 종이에 바로 글자를 써버리면 줄이 맞지 않고 비뚤어지기 때문에 종이를 부채 접기 하듯이 잘근잘근 접어서 줄을 표시한 담에 거기에 맞춰서 쓰는게 기본 요령이었다. 간혹 그렇게 접지 않고도 줄을 칼같이 맞춰서 쓰는 기술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런 친구들은 발표자료 제작에서 우대를 받곤 했다. 끝이 약간 비스듬한 사각형으로 된 매직이 획의 굵기에 변화를 주면서 큰 글씨를 쓰기위한 도구였다.

궤도를 가장 마지막까지 사용한 곳은 아마 교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찬송가 가사 등을 적은 궤도를 한 번쯤은 다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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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발표 자료에 첫번째로 혁명을 가져다 준 것은 OHP(OverHead Projector)였다. 이게 뭐냐면, 투명한 필름에 네임펜으로 글을 써서 램프 위에 올리면 위쪽에 달린 프로젝션 렌즈를 통해서 벽에 확대해서 비춰주는 기계다. 여기에 사용되는 투명한 필름이 OHP 필름이고, 이 필름에 글을 쓰는데 주로 사용된게 바로 네임펜이다. OHP 를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요즘 세대가 보기에 네임펜이란 건 그냥 얇은 매직과 비슷한 물건이겠지만 그 당시의 네임펜은 이런 발표자료를 만들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여기도 줄을 맞춰 쓰는게 어렵기 때문에 줄 쳐진 공책 위에 필름을 놓고 쓰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투명한 아크릴 재질에 끝쪽에만 빨간색으로 삼각형이 달려있는 지휘봉은 이 OHP 시절의 물건이다. OHP 자체는 사양세를 걸었지만 OHP 헤드유닛에 들어있는 렌즈 어셈블리는 지금도 자작 프로젝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자원으로 취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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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P에도 한 차례 혁신이 찾아왔는데, 그건 바로 개인용 PC의 보급과 프린터의 대중화였다. OHP 필름에 인쇄를 할 수 있는 프린터가 가정에 보급되고, 그로 인해 워드 프로세서로 만든 자료를 바로 OHP 필름에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이제 손글씨를 잘 쓰는 학생보다 집에 프린터를 가진 학생이 조별 과제에 더욱 요긴한 자원이 된 것이다. 다만 이는 OHP 시대의 마지막 즈음이어서, 프린터 가진 학생이 조원들에게 갑질을 할 수 있는 시대는 길게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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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P 말엽에 잠시 등장했던 것이 실물 화상기다. 말 그대로 OHP 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프로젝션 렌즈 대신 카메라가 달려서 물건을 화면으로 띄워주는 기기였다. 이 실물 화상기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발표장에 반드시 대형 화면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사실 대형 화면이 보급되면서 이 화면의 활용성을 여러가지로 모색하던 시절의 반짝 유행이 아니었다 싶다. 실제로 대형 화면이 있는 곳에는 pc만 연결하면 그냥 pc 화면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에 실물 화상기는 생각보다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요즈음 소형화되어서 카메라처럼 사용하거나 아예 모바일 기기를 실물화상기 대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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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면 프로젝션 TV가 보급되고, 프로젝터도 대중화되고, pc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이후 발표자료는 대부분 ppt 로 대체된다. 이 시기 즈음에 인터넷의 보급도 활발해지면서 자료를 조사하는 것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편리해지고, 이제 조별과제는 말 그대로 '성의'와 '창의'의 문제로 변했다. 이제 얼굴 한 번 안 보고 메신저를 통해서 과제를 진행할 수 있는 시대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모두 모여서 2절지를 접고 서로 글씨 대결을 하거나 머리를 맞대고 네임펜으로 한 자 한 자 OHP 필름에 내용을 적어내려가던 시절의 재미가 사라진 것이 조금 안타깝다. 다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놓고 분담해서 자료를 찾고 글씨 잘 쓰는 학생을 뽑아 발표 자료를 만들어야 했던 그 시절에는 조별과제 자체가 불가피한 수단이었겠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이 모든 과정을 그 시절보다 더욱 쉽고 퀄리티 높게 해낼 수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조별과제는 대체 무얼 위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