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예전에 만들었던 룰렛 을 MIT 라이센스로 공개해뒀다. ( Github 링크 , 당시 포스트 ) MIT 라이센스는.. 간단히 말하자면 어따 쓰던 맘대로 해라, 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걸 가져다가 여기저기 개작해서 사용하는 케이스들을 많이 봤지만 그냥 재밌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희한한 메일이 왔다.

발단

메일의 내용은 이랬다.

해당 핀볼 룰렛을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중에 사용을 했는데
핀볼이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저작권 등록이 'XXX' 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구요
방송중에 시청자들 이름 넣고 추첨해서 기프티콘 주는 이벤트 진행하고 있었구요.
혹시 해당 핀볼룰렛이 저작권 등록이 되어 있는지 / 그리고 실시간 스트리밍 중에 사용이 불가한지 여쭤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저작권위원회는 뭐고 등록은 또 무슨 이야기인가. 깜짝 놀란 나는 답장을 보내 자초지종을 더 자세히 물어봤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 메일 보낸 사람은 유튜브에서 스트리밍을 하고 있는 유튜버다.

  • 라이브 스트리밍 중에 룰렛을 컨텐츠로 사용했는데 해당 영상이 저작권 침해 신고를 받아 내려갔다.

  • 저작권 침해 신고에 놀라 찾아보니 XXX 의 이름으로 '한국 저작권 위원회' 에 저작권 등록이 되어있었다.

  • 그래서 제작자인 내게 사실 확인을 위해 메일을 보냈다.

전개

깜짝 놀란 나는 우선 룰렛 사이트에 '유튜브 방송이나 영상 제작 등 어떤 용도로 사용해도 무관하며 저작자인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 권리주장을 하지 않는다' 라는 공지를 추가하고 혹시 비슷한 사례가 있으면 제보해달라는 내용을 넣었다. (물론 그런 제보는 오지 않았고 그 창구로는 주로 개발 의뢰나 기능 추가 요청이나 이상한 메시지만 왔다)

그리고 한국 저작권 위원회에 정말 등록이 되어있는지를 확인해봤다.

그리고 두둥! 정말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마블 룰렛'이 등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 자체를 다운받거나 프로그램 소스 코드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등록 내용을 보면 아무리 봐도 내가 만든 마블 룰렛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나는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사실 그냥 자기가 만든거라고 남한테 뻥을 치는 정도야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그걸 가지고 타인에게 해꼬지를 했다는 점이었다.

우선 한국 저작권 위원회에 해당 사안에 대해 전화로 문의를 넣었다. 해당 시점의 대화를 요약하면 이렇다.

나: 누군가가 내 저작물을 자신의 이름으로 저작권 등록 신청을 했는데 이럴 때 해당 저작물의 등록을 원 저작자인 내가 철회시킬 절차가 있는가?
상담원: 그런 절차는 없다. 정말로 원한다면 법적으로 소송을 걸어 판결을 가져와야 한다.
나: 저작권 위원회에 등록을 하는 시점에서는 등록하는 사람이 저작권자인지를 검증하지 않는가?
상담원: 저작권 위원회는 검증 같은 걸 할 권한이 없다.

어안이 벙벙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는 상황. 당연히 해당 사람이 등록한 소스코드나 내용을 내게 보여줄 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상담원이 말한 대로 경찰서에 가서 고소장을 접수했다.

'내 저작물인 프로그램을 타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저작권 위원회에 등록하고 그걸 근거로 유튜브 등지에서 부당한 권리 행사를 하고 있다'는 요지였다. 담당 수사관도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이걸로 내가 금전적 피해를 보거나 한 것도 없고 상대가 금전적 이득을 취했는지 여부도 불분명한 상태다 보니, 사태가 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별 황당한 일이 다 있네요, 라는 느낌의 수사관을 통해 우선 고소장을 접수하고 하염없이 결과를 기다렸다.

위기

한참이 지나서 불송치라는 결과가 왔다. 왜 그런지 수사 결과 통보서에 써있는 내용과 담당 수사관과의 통화를 통해 들은 내용을 종합하면 '저작권 위원회에 문의 결과 저작권 위원회에 등록하는 것은 저작물의 공표로 볼 수 없다는 답변에 따라 해당 사건은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없다' 는 것이다.

그런데 저작권이라는 말은 여러가지 권리를 합쳐서 말하는 것이다. 나의 저작물을 맘대로 사용하는 것과 나의 저작물의 남이 자신의 저작물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침해하는 권리가 다르다. 전자가 저작재산권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저작인격권을 가리킨다. 따라서 저작권법에서도 '타인의 저작물을 자신의 저작물인 것 처럼 등록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단 이러한 수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저작권 위원회에 문의를 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문은 나고, 답은 저작권 위원회 상담사)

문: 수사 결과 불송치가 떴는데 이러면 타인이 등록한 건을 취소할 수 없는가?
답: 그렇다.
문: 왜 진짜 저작자인지를 등록 시점이나 이의제기 시점에 확인하지 않는가?
답: 판례상 저작권 위원회에는 그런 권한이 없다.
문: 저 사람이 등록한 프로그램의 소스코드를 내가 볼 방법은 없는가?
답: 없다.
문: 그러면 나로서는 저 사람이 진짜로 내 저작물을 도용해서 등록한 것인지를 알 방법이나 증거를 수집할 방법이 없는가?
답: 그렇다.
문: 내가 혹시 저작물을 저작권 위원회로 보내며 검토를 요청해서 위원회 내부적으로 내 코드와 등록된 저작물을 비교해서 완전히 동일하더라도 위원회로서는 해당 등록을 취소할 수 없> 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맞는가?
답: 그렇다.
문: 이런 경우 나같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는가?
답: 똑같은 프로그램을 당신도 등록 신청할 수 있다. 혹은 다시 고소를 해서 사법 기관의 확정 판결을 받아와야 한다.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저작권 위원회의 저작권 등록 시스템은 타인의 도용 여부나 기존에 등록된 저작물과 동일한 지 여부 등을 판단할 권한도 없고 검증을 위한 절차도 없다.' 는 것이다. 상당히 비틀린 제도라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니 다시 경찰측에 문의를 했다.

수사관에게 '어째서 나에 대한 저작인격권 침해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았는가'를 물어보니 고소장에 '저작물을 저작권 위원회에 무단으로 등록하여 복제 및 공연하고 공표하였다는 취지의 주장'이라고 씌여있었기 때문에 공표에 관해서만 수사한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런 경우 재수사를 요청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수사결과이의신청'이라는 것을 제기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수사결과이의신청을 제기했다.

절정

수사결과이의신청이 차곡차곡 진행되어 기존에 불송치된 사건 기록은 강제로 검찰로 넘어가고 검찰이 수사중인 상태가 되었고, 이제나 저제나 하염없이 결과를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수사 결과 우편이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쿨하게 한 줄로 '혐의 없음(증거 불충분)' 이라고만 씌어있었다.

결말

결론적으로 나는 빤히 내 저작권을 도용해서 저작권 위원회에 등록하고 그걸 근거로 타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꼴을 보고도 법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일단은 기운이 빠져버려서 이 사건에 대해 생각도 하기 싫은 지경이다.

이런 결말이 된 원인이나 나의 패착, 혹은 이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지책이 뭐가 있었을까?

  • 애초에 내가 먼저 저작권 위원회에 돈을 내고 내 저작물이라고 등록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위의 문답에서 나왔듯이 내가 먼저 등록을 했었더라도 나중에 타인이 똑같이 이걸 도용해서 저작권 등록을 시도했다면 그 등록도 받아들여지고, 나는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기운빠진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 상식적으로 깃헙에 소스코드를 공개한 기록이 공공연하게 버젓이 있고 내가 이 것을 통해서 어떤 금전적인 이득을 취할 것도 아닌데 굳이 돈을 써가며 저작권 등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이런 등록제도가 있다는 것 자체를 이 사건으로 처음 알았는데.

  • 법알못이 직접 고소하겠다고 용쓰지 말고 애초에 변호사를 고용했어야 한다?

이건 맞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한다. 변호사를 통했다면 고소장도 제대로 작성되었을수 있고 정보 공개 청구나 여러가지 방법들을 알아봐줘서 다른 결과를 이끌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위에도 썼다시피 내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얻는 이익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커피 사주기 버튼이 있긴 하지만 반쯤은 재미로 달아 놓은거고... 여태까지 몇년간 그걸로 모인 총액이 내 일당만큼도 안된다...) 따라서 손해배상 청구를 하기도 애매하고 단순한 형사고소가 될텐데, 거기에 들어가는 변호사 수임료를 부담하겠다는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

두 세명의 변호사와 해당 건에 대해 상담도 해봤는데 이런 경우 형사 고소에서 변호사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고소장 작성에 도움을 주는 정도라는 답변도 들었다. 수임료 대비 실익이 크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사이다 없는 힘빠지는 결말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 나중에 기운이 생기면 뭔가 다시 방법을 찾아볼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렇다.